먼저, 오늘 공판에 앞서 진행된 준비기일 동안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이끌어 주신 재판장님의 노고에 대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8월 28일, 내란 음모 사건이 터졌습니다. 실용과학위성 아리랑 3호 발사 참관을 마치고 러시아에서 귀국한지 3일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랐지만 아마 저보다 더 놀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단언컨대, 저는 내란을 의도한 적이 없으며 그래서 씌워진 ‘내란음모’라는 엄청난 혐의에 대해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내란을 음모한 혐의로 이 자리에 서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낯설고,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사건의 피고인으로서 이 재판을 통하여 이 부조리한 풍경이 바로 잡히고 저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진보당에 새겨진 주홍글씨가 벗겨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이것은 온갖 선입견과 예단으로부터 벗어나 진실을 직면하고 이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80년대 초 대학에 입학한 이후 지금까지 저는 운동권으로 살아왔습니다. 국회에 처음 등원할 때도 저는 스스로 운동권의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제가 운동권이라고 표현한 것은 20대 홍안의 청년이 갖는 깨끗함, 첫 마음처럼 그 어떤 기득권에도 물들지 않고 또 어떤 도그마에도 갇히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20대 청년기의 정점에서 저는 역사적인 87년 6월 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경험하였습니다. 억압이 있는 곳에 민중의 저항이 있으며 하나로 뭉친 민중의 힘 앞에는 이 세상 막을 자 없다는 체험적 각성은 평생의 신념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저의 30대는 20대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90년대는 동구가 몰락하고 북의 경제적 어려움이 알려지면서 운동권에는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진보운동에 희망이 없다면서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애초부터 소련이나 북을 보고 운동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서있는 이 땅 우리 민중 현실에서 진보는 출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는 1997년의 정권교체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선거라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도 사회진보의 큰 발을 내딛을 수 있다는데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진보정당을 통해 사회진보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런 생각에 따라 진보정당건설을 일관되게 지지해왔습니다. 그러나 오랜 수배로 인해 이런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2003년 출옥 이후 저는 진보정당을 지원할 수 있는 가장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설립한 것이 여론조사기관이었고 이를 발전시켜서 선거 전략을 기획하고 홍보를 돕는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솔직히 그때까지는 진보운동은 과거에 해왔던 집회와 시위에는 능하지만 선거는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면서 아예 관심을 두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먹구구로 그냥 ‘선전’의 장으로만 보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반면 기성의 정치권은 여전히 돈의 힘으로 선거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진보진영이 선거를 기성 정치권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돈으로 표를 모으는 정치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민중의 마음을 모아가는 정치적 실천이 절실하다는 결론을 스스로 찾았습니다. 저는 민심을 과학적으로 읽고 유권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정책을 개발하는 것으로 돈 선거와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저와 동료(CNP)들은 밤낮으로 일했고 또 성과도 꽤 냈습니다. 무명의 여성 농민이 민주당 호남 아성을 무너뜨리고 선거에 당선되는 기적 같은 사연도, 민주주의 후퇴에 맞서 최초의 야권연대 승리를 만들어낸 수도권 교육감 당선의 감동도 그 과정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진보진영에서 처음으로 과학적 선거를 만들어냈고 그래서 무명이지만 능력 있고 참신한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좋은 평가도 들었습니다.
대중적 진보정당 노선에 대해 보다 직접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 저는 작년 총선에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사실 국가보안법으로 수감된 경력이 있다는 것이 혹시 당에 누가 되지 않을까? 고민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 정도도 안 되는 후진적 사회라고는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저는 보수언론의 표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종북색깔 공세와 함께 당내 비례 경선을 둘러싸고 저를 조준한 부정선거 의혹이었습니다. 검찰은 당원 명부는 물론 모든 당원의 투표내역까지 열어보며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습니다. 경선부정의 몸통처럼 여론을 몰고 갔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저를 기소조차 못하였습니다. 종북 색깔 공세와 경선부정이란 멍에와 함께 시작한 국회의원이지만 저는 진보정당의 의정활동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미래부장관 후보자인 김종훈씨가 미국 CIA를 위해 일한 것을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국적보다도 미국 정보기관을 위해 일해 온 사람을 핵심부처 수장으로 앉힐 수 있다는 박근혜 정부의 위험천만한 의식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주한미군이 우리국민 혈세로 지급한 방위비 분담금을 7천억이나 쌓아두고 있음을 폭로한 것도 한국사회에서 미국이란 어떤 존재인지, 우리의 외교와 제도는 어떻게 개혁돼야 하는지를 호소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언론기득권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앞장서서 종편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정치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언론)방송이라지만, 저는 눈치 볼 것 주저할 것도 없었습니다. 종편의 왜곡보도는 물론, 태생 자체가 잘못된 종편에 대한 엄정한 재승인 심사기준 마련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세계 10위권의 군사력에다 북의 국내총생산보다 많은 한 해 34조원의 국방비를 쓰면서도 전작권을 60년 동안 미국에 내줘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정치 현실을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분단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정원과 군사이버 사령부가 불법적으로 대선에 개입한 것은 모두 반북 대결주의 산물입니다. 분단이 유지되는 한 이런 일은 계속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은 낡은 이념이나 화석화된 신념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외면하자는 주장, 그것이야말로 낡은 선입견이고 무지막지한 도그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제가 지금껏 살아온 과정을 말씀드린 것은 저에 대해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바라봐 주실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론에서 만들어진 이미지처럼 그 어떤 주의에 매몰되어 외눈박이로 살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실사구시’ 현실에서 진리를 찾는다는 것이야말로 저에게 배어 있는 원칙이었습니다. 저는 북의 공작원을 만난 적도 없고 그로부터 무슨 지령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검찰의 기소조차 이와 같은 부분을 적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제가 한 모든 말과 행동이 마치 북의 지령을 받아 이를 수행한 것처럼 되어있습니다. 이런 선입견과 예단이 없이는 아예 이번 사건이 성립하지도 않았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 이번 사건의 출발이자 종착점이 된 5.12의 강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5월 12일에 경기도당 임원들의 요청을 받아 강연을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이 땅에 드리워진 전쟁의 그림자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북이 남침을 할 경우에 이에 호응해서 그 무슨 폭동을 일으키려 했다는 게 저에게 제기된 공소요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북이 남침하는 상황을 예상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북을 공격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탈냉전 이후의 전쟁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모든 전쟁이 미국이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지금, 지구상에서 다른 나라를 공격해 승리할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미국밖에 없습니다. 북과 미국의 군사적 대결이 이어져 오고 있지만 북이 미국을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일은 누구도 상상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라크건 아프가니스탄이건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란이건 북이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미국이 북을 침공하는 일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제가 우려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위기는 전환적 시기의 특징입니다. 낡은 시스템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위기가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근근이 평화를 지탱해왔던 정전체제가 위기를 맞고 있다면 이것은 역으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체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로 갈 수 있는 하나의 기회로 될 수 있다는 게 저의 판단이었습니다.
제가 지난 4월 25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전쟁위기 해소와 항구적 평화를 위해 ‘남북미중 4자회담’을 정부에 제안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나아가 저는 이 같은 대전환기를 맞이하기 위해 진보정당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이 있게 토론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5.12 강연의 배경이고 진실입니다.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는 우려가 들려옵니다. 이번 사건을 포함하여 많은 점에서 그런 우려는 근거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역사는 후퇴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비록 잠시 그렇게 보일지라도 한 번 민주주의를 경험한 민중이 독재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역사는 정의 편이며 정의는 민중에 의하여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게 재판에 임하겠습니다. 끝까지 경청해주신 재판장과 재판부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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