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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죽비]진보적 지식인들의 침묵

[시인의 죽비]진보적 지식인들의 침묵

지난 봄부터 초가을까지 이 땅에 광풍이 휘몰아쳤다. 좌우합작의 통합진보당 ‘마녀사냥’이었다. 칼에 등을 찍힌 마녀는 화형 직전에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제 그 후폭풍이 몰려오고 있다. 얼마 전 통진당 부정선거에 대한 검찰 수사결과가 발표되었는데 4명이 구속됐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경선부정의 ‘가해자’인 당권파(종북좌파)가 아니라 ‘피해자’인 탈당파(당시 신당권파, 현재 진보정의당)였다. 부정선거를 조사한 김인성 겸임교수(한양대)의 인터뷰는 사뭇 충격적이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선거는 온라인 선거란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깨끗하게 치러진 선거였다. 당권파들에 의한 조직적 부정, 소스 수정을 통한 조작은 없었음이 로그에 의해 밝혀졌다. 참여계 사람들이 숨어서 저지른 불법행위뿐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국민들의 통진당에 대한 불신의 근거는 모두 부정행위자가 만들어낸 거짓말일 뿐이다.”

“정말 야비하고 정략적인 공격이다. 그런데 정작 검찰 수사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부정선거라고 비난한 사람들이다. 참여계 사람들이 ‘대포폰’을 동원하고, ‘콜센터’를 만들어 대리투표를 했다. 그동안 비난받은 소위 당권파들은 정직하게 투표했다. 검찰이 4만명을 6개월 조사해 10여명 구속했는데 대부분 참여계다.”

결론은 한마디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뺑소니 사고’라는 것이다. 간혹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살인자가 진범이 잡히자 무죄로 석방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미 살인자로 여론재판을 받은 그는 해명의 기회가 없다. 그래서 살인자 아닌 살인자인 것이다. 부관참시 당한 통진당의 ‘종북좌파’ 역시 그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니다. 내가 페이스북을 할 때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담벼락과 댓글에는 연일 통진당 당권파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글들로 넘쳐났다. 이 기회에 종북좌파의 씨를 말리기라도 하듯 보수언론은 칼춤을 추었고, 그 장단에 맞춰 진보언론까지도 괴성을 질렀다. 모두 진보를 멸종시키기 위해 ‘괴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아마도 좌우파가 일심동체가 되어 이렇게 호흡이 잘 맞는 경우는 2002년 월드컵 이후로 처음이 아닌가 싶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 정서나 폭력사태, 패권주의 등을 생각하면 공감 가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다만 그 당시 내가 말을 아꼈던 것은 당권파의 부정선거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오히려 비공식 채널이지만 애당초 부정선거를 저지른 참여계가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언론플레이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당권파가 폐기처분한 김인성 교수의 2차 진상보고서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문제는 통진당 사태의 진실이 밝혀진 지금이다. 그런데 홍위병처럼 성급하게 융단폭격을 가했던 그 어느 누구도 자기반성이나 성찰을 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진보언론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반공-멸공-용공-주사파-좌파-종북좌파’로 진화된 용어에서 볼 수 있듯 ‘신반공시대’이다. 그런데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통진당 사태의 후폭풍이 감지된다. 통진당에서 나간 탈당파 인사들은 현재 ‘진보정의당’으로 당적을 옮겼거나 문재인·안철수 캠프로 흩어져 있다. 이 민감한 시기에 검찰이 칼을 뺀 것도 미심쩍은데다 ‘몸통’을 방목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미심쩍다. 혹 정권교체가 실패하더라도 그에 대한 희생양은 반드시 따르기 마련이다. 늘 그렇듯 대선 직전은 ‘북풍시장’의 가장 큰 대목이다. 비행기가 추락하기도 하고, 빌딩이 폭파되기도 하고, 북한에서 포탄이 날아오기도 한다. 어쩌면 이번엔 야권진영 전체가 마녀사냥의 광풍 속으로 소용돌이칠지도 모른다.

한 번 거짓말을 하면 그것을 감추기 위해 한 번 더 거짓말을 해야 한다. 진실 앞에는 무릎 꿇지 못하지만 권력 앞에는 무릎 꿇는 게 진보의 거품이다. 진보의 몸속에는 권력이란 괴물이 자라기 때문이다.

<이산하 | 시인>

입력 : 2012-11-23 21:28:59수정 : 2012-11-24 00: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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